
흔히 사람들은 '기요틴 Guillotine 이라는 이름은 그걸 발명한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며, 제작자 기요틴 역시 기요틴으로 처형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사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La Guillotine'이라는 글을 시작하기 위해서 찾아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_+
첫째, 유사한 장치는 프랑스 혁명 (Révolution française) 이 일어나기 이미 3세기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걸 개선한 장치가 프랑스 혁명때 본격적으로 쓰이게 되어 유명해지게 된 것입니다.
둘째, Joseph-Ignace Guillotin 박사는 이걸 발명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없이 빠르게 사형 (peine de mort) 을 집행할 수 있는 장치의 필요성을 제안한 사람입니다.
셋째, 기요틴 박사는 처형당한게 아니라 76세의 나이로 왼쪽 어깨에 생긴 큰 종기때문에 죽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J. Guillotin은 해부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의사였고, 의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지위에 관계없이 고통을 최소화하는 사형방법'을 개발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구요?
그 당시 사형 집행은 교수형 (pendaison) 이나 참수형 (décapitation)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형에서도 지위에 따른 불평등이 존재했는데, 그건 바로 얼마나 오래, 얼마나 괴롭게 죽어가는가에 대한 불평등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지위가 높은 귀족들은 사형을 당하더라도 참수형만을 당했고, 망나니가 칼을 날카롭게 갈도록 가족들이 돈을 쥐어줘서 큰 고통없이 죽었습니다. 반면에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참수형을 당하더라도 칼이 무뎌서 몇 번씩이나 칼에 맞으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갔고, 그렇지 않으면 역시 고통스럽게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기요틴 박사는 모두가 고통없이 빠르게 처형당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낸 것이었습니다. 뒤이어 위원회가 구성되어 (기요틴 박사도 참여) 예전부터 유럽 여기저기에서 쓰이고 있던 무거운 칼날을 이용한 단두대를 도입하여 개량하게 된 것입니다.
기존의 단두대에서 쓰이던 반달 모양의 칼은 머리를 자른다기 보다는 목을 부수었는데, 개량된 단두대는 경사진 칼날을 달아 아주 효과적으로 머리를 베었다고 합니다. 기요틴의 정확성과 속도는 매우 인상적이었고, 이 장치는 곧 널리 쓰이게 되었습니다. 사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머리를 벨 사람이 넘쳐 났죠.
그나저나 이 새로운 장치의 이름은 '기요틴'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기요틴 박사는 실제로 디자인에 별 기여를 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장치의 제작에 중심이 된 인물은 Antoine Louis라는 의사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장치의 이름은 'louison'이나 'louisette'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면 왜 이름이 바뀌었을까요?
그때도 문제는 언론이었습니다. ^^; 언론들은 평범한 이름 '루이'보다는 묘한 울림을 주는 '기요틴'이 더 낫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기요틴'으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요틴으로 처형당한 사람 중에 '기요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긴 있었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리옹 Lyons 에 사는 J.M.V. Guillotin이라는 의사가 있었다는군요.
According to Brewer’s Dictionary of Phrase & Fable the unfortunate of the same name who died by the guillotine was J.M.V. Guillotin, a doctor of Lyons.
참고
유용한 상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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